봉사공(19世 金錫) 묘비문에서 조선시대 당쟁의 이면사를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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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작성일24-07-04 16:56 조회80회 댓글0건본문
奉事公(휘:金錫=19世) 墓表碑陰記
공의 휘는 금자석자요 자는 연옹이니 본래성이 김씨인 십팔세조 행자가 신라종성으로서 고창군을 지킬 때에 견훤이 갑자기 들어와 포석정에서 임금(경애왕)을 죽이니 행자가(이후 자자생략) 나라의 세력이 떠나버려서 고려태조가 장차 삼한을 통일할 것을 내다보고 드디어 그 새 임금 김부(경순왕)를 모시고 고려에 돌아오니 태조가 이르되 행은 능히 기회에 밝아 권도를 달성하였다 하고 이어 권으로 성을 내리고 태사를 주며 고을로 식읍을 삼아 안동부로 올렸다. 태사로부터 팔세 중시에 이르러 두 아들이 있으니 수평과 수홍이라 수평의 뒤에는 문충공 권근 익평공 권람등 훌륭한 벼슬이 있어 세상에 이름난 겨레가 되었고 수홍의 뒤는 더욱 현달했으니 수홍은 대장군 자여를 낳고 자여는 책을 낳고 책은 한공을 낳았는데 한공은 고려 끝 무렵에 벼슬하여 도첨의정승 예천부원군에 이르고 대광보국 화원군 중달을 낳고 중달은 정순대부 판종정시사 휘 사종을 낳고 종정은 중훈대부 군기감정 휘 집덕을 낳으니 바로 공의 증조이시다. 봉열대부 지양산군ㅘ 휘 촌을 낳고 양산이 사용 휘 계우를 낳았는데 사용은 숭정대부 윤변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묘(1447)년에 단계 집에서 공을 낳고 얼마 안 있어 사용이 돌아가시니 공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삼가 받들었다. 21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31살에 광릉참봉이 되고 39살에 전옥서 봉사로 옮겼는데 사람들이 다 그 펴지 못함을 아까와 했는데 이해 섣달 초이렛날에 서울에서 앓다가 돌아가시니 실은 성화을사(1485)년이더라. 부인의 성은 김씨로 역시 상주의 양반이라 장악원정 휘 경손의 딸이요 지사간원사 복항의 손녀요 판사재감사 수의 증손이요 강화부사 성익의 외손이라. 열세살 되던 해에 공에게 시집오니 공으로 더불어 동갑이라.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맏이는 시민 인데 계묘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다음은 시주인데 다 일직 죽었고 다음은 시득인데 무관으로서 내금위 사직을 받았고 다음은 시준인데 선비로 일삼는다. 딸의 맏이는 생원 변희철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감역관 연수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비 정홍에게 시집갔다. 앞서 봉사의 돌아 가셨을 때에 널을 모시고 서울로부터 삼가현 산북리의 언덕에 반장했는데 그 뒤에 두 아들 한 딸이 연달아 죽으니 점치는 이가 장사에 터를 얻지 못했다고 이르니 아들 시득 시준에게 명하여 정덕 2년 정묘(1507)에 단성현 동쪽 정곡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이 또 (1507)돌아 가심에 이르러 이어 붙여 장사하니 공묘는 오른쪽에 있고 부인묘는 왼쪽에 있다. 장차 장사하려 할 때에 시준이 의흥현감을 지낸 조언형에게 와 이르기를 내 형님 시민은 생원으로서 서울 안에 지내면서 사귀는 바가 다 이름난 계층이라 큰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드러난 분도 많으나 형과 정의가 밀접하여 우리 집안의 상세함을 아는 이는 그대만 못하기 때문에 여러 돌에 색일 것을 청한다. 하기에 내 글이 서툴다 사양하여도 듣지 않아 드디어 쓰노라.
1508年 月 日 전현감 조언형이 삼가 짓고
1512年12月12日세우고,
1988년10月 9日 고쳐 세우다.
전현감 조언형(南冥 曺植의 父)이 1508年에 짓고 1512年12月12日에 세운 비문에.....네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맏이는 시민 인데 계묘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다음은 시주인데 다 일직 죽었다고 기록.
子 逸이 撰한 三槐堂 家狀에 1464((世祖10년 甲申)에 나시어 1523(中宗18 癸未)에 享年 60歲로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三槐堂의 渭川面誌 評傳(刪削)에 1464년에 출생, 1483년(成宗14) 癸卯傍에 生進 하여 洗馬벼슬을 하다가 1498(燕山 4)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을 비롯한 영남 사림(士林)은 크게 화를 입자 김굉필의 문인으로 난을 피하여 妻鄕인 安陰 사마리(司馬里)로 내려와 정확계(鄭蠖溪) 등 어진 이와 더불어 강마도의(講磨道義)하며 살다가 황산(黃山)마을 뒤 계양동(桂陽洞)에 묻혔다.
면지에 보는 바와 같이 사화를 피하여 낙향한 신분이라 단성관아(丹城官衙)의 추적(追跡)을 따돌리기 위하여 김씨 할머니의 의도(意圖)로 비문이 지어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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