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유래
안동권씨 유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성화보 서문에 권씨 득성 유래를 “권씨(權氏)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신라 말에 김행(金幸)이라는 이가 고창군(古昌郡)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에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왕비를 능욕하자 고려 태조가 구원하려 달려와 견훤과 서로 버티고 있었는데, 김행이 여러 사람들과 도모하여 말하기를 “견훤은 의리상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어찌 왕공(王公)에게 歸依(귀의)하여 이 통분을 씻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고려 태조를 맞이하였다.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김행은 기미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이내 성을 권씨로 賜姓(사성)하고 태사(太師)를 제수한 다음 군(郡)을 식읍(食邑)으로 삼아 주고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라 적어 병산 대첩을 927년의 신라 구원전의 일환(一環)으로 썼는데
原文:權,本新羅宗姓金氏也,羅季有金公幸者,守古昌郡時,堅萱入新羅,試王辱妃,高麗太祖,赴救與萱相持,幸謀於衆曰,萱義不共戴天,盍歸王公,以雪痛憤,遂迎降,麗祖曰,幸能炳機達權,乃賜姓權,授太師,以郡爲食邑,陞郡爲安東府
고창전역(古昌戰役)은 견훤의 경주(慶州) 유린(蹂躪) 3년 후에 있은 싸움으로 백제의 승승(乘勝) 북진(北進)에 대하여 고려 태조가 친정(親征)에 나섰으나 예안진(禮安鎭)에서 퇴로를 걱정할 정도로 사기(士氣)가 침체(沈滯)하였는데 고창군(古昌軍)의 영항(迎降)에 힘입어 견훤을 대패(大敗)시킴으로써 정세를 역전(逆轉), 후삼국통일의 전기를 이룬 대승리였다.
태조 天授10년 丁亥(927)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 36년>
○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尙州 聞慶間)을 쳐서 이를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永川)를 습격하고 경주 교외에 가까이 이르니 신라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시중 공훤(公萱)ㆍ대상(大相) 손행(孫幸)ㆍ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이르기를, “신라가 이제 급한 일을 당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공훤 등에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는데,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신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몰랐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안에 두고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능욕했으며, 그 부하를 놓아 빈첩(嬪妾)들을 난행(亂行)하게 하였다. 왕의 표제(表弟=外從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자녀와 각종 공인(工人)ㆍ무기와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돌아갔다.
<고려>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천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公山:대구 팔공산))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고려왕을 포위하자 대장 신숭겸(申崇謙) 김낙(金樂)이 힘껏 싸우다가 죽고, 모든 부대가 패배(공산전투)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 왕은 두 사람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다.
天授 12年 己丑(西紀 929年) <新羅 敬順王 3年. 後百濟 甄萱 38年>
○ 안동(古昌)은 고려가 신라와 왕래할 수 있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통로에 있었고 후백제는 경상도 지역을 넓게 차지하여 고려의 南進을 막고자 하였다. 따라서 안동과 문경 등 일원은 양측이 치열한 接戰(접전)을 벌인 지역이었다. 견훤은 공산전투의 승리로 이미 중요한 요충지를 차지한 상황에서 다시 929년에 의성.순흥.영주지역을 침범하고 문경과 고창지역도 포위하였다.
이리하여 왕건의 고려군과 견훤의 후백제군은 다시 운명을 건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니 이를 甁山(병산)전투 또는 古昌(고창)전투라 부른다.
天授 13年 庚寅(西紀 930年) <新羅 敬順王 4年. 後百濟 甄萱 39年>
○ 봄 정월 <丙戌=21日-高麗史>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의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니, 서로의 거리가 5백 보쯤 되었다. 후백제군은 이미 공산전투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어 사기가 극도로 높았고 숫자 또한 많았으며, 고려군은 열세였고 힘겨운 싸움이 예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포위된 고창성[古昌城, 안동]내의 金幸(김행), 金宣平(김선평), 張貞弼(장정필) 세 사람이 모여 상황을 주시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게 된다. 이들은 城內에 살며 세력과 영향력이 컸던 호족들이었다.
김선평은 城主였다고 한다.
우리 始祖(幸)께서 나서서, “견훤은 義理(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이니 어찌 王公(고려태조)에게 돌아가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 民命을 살려 통분을 雪恥(설치,설욕)하지 않으리오?” 라고 두 사람을 설득했다. 마침내 세 사람은 고려 태조 왕건에개 歸附(귀부)할 뜻을 전한 후 곧 고려군을 맞아 들였다. 열세한 전력으로 고심하고 있던 왕건과 휘하 장수들은 크게 반겼고 군사들의 사기 또한 크게 올랐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마침내 서기 930년 1월 전투가 시작되었다.
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庚寅=25일(勝捷 4日後)>에 고창의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正二品)으로, 권행(權行)과 장정필(張貞弼)을 대상(大相=正四品)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올려서 식읍으로 삼았다. <특히 우리 시조에게는 “幸은 기미(幾微=기회)에 밝아 權道를 達成했다.”하고 權으로 賜姓(사성)하였다. 이날을 권씨 得姓 紀元으로 삼아 2023을 권기 1094년으로 헤아린다. > 이에 영안(永安=永川)ㆍ하곡(河曲=河陽)ㆍ직명(直明 안동지역)ㆍ송생(松生=靑松) 등 30여 군ㆍ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 2월에 ...... 이때 신라의 동쪽 주(州)ㆍ군(郡) 부락(部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 안동)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역사는 가정(假定)이 없지마는 만약에 三太師가 여제간(麗濟間)에 中立을 지켰거나 百濟에 협력하였다면 古昌의 승패(勝敗)와 삼한(三韓)의 主人이 어떻게 되었을까?
권태사의 나도(羅都) 유린(蹂躪)에 대한 의분(義奮)과 삼태사(三太師)의 현명한 선택이 견훤에 대패(大敗)를 안겨주고 高麗가 대승(大勝)을 거두어 공산(公山) 참패 후 수세(守勢)에 급급하던 고려가 일거(一擧)에 역전(逆轉)하여 통일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세 분은 統一후 940년(태조 23년) 30名을 한정(限定)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策錄)되고 983년(成宗 2년)에는 안동 부민(府民)이 견훤으로부터 어육(魚肉)을 면하게 한 공덕(功德)을 기려 부사(府司)에 사당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시작한 것이 1,000年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일 삼중대광(三重大匡=正一品) 태사(太師=임금의 고문으로 인신(人臣)의 최고 관직)에 증직되었다.>
[ 참고자료 : 고려사절요, 보학소고[(안동권씨 산청종친회 權由鉉 편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