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옹 공

묵 옹 공

 

m01.png 묵옹공 약전(黙翁公 略傳)

 

公의 諱(휘)는 潗(집), 字는 達甫(달보)로 고려태사 諱 幸(행)의 후손이요, 태사는 본디 신라의 국성 金氏로 그가 고려 태조에게 歸依(귀의)하여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했다.”는 炳幾達權(병기달권)의 뜻으로 姓을 얻어 권씨가 되었다.

 

태사공 이후에 八代를 지나 諱 守洪이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府事 尙書左僕射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였으니 이로부터 대대로 명관이 續出(속출)했다.

高祖의 諱는 金錫으로 典獄署(전옥서) 奉事요 曾祖의 諱는 時準(시준)으로 永慶殿(영경전) 參奉 祖의 諱는 運(운)으로 尙衣院 別提(상의원 별제)요 考의 諱는 世仁으로 軍器寺(군기시) 판관이다.

공이 隆慶(융경) 己巳年(1569년) 4월 10일 단계에서 탄생하시니 나면서  총명

하고 뛰어나 무릇 七, 八세에 책과 史記를 받아 가르침을 번거로이 하지 않아도 깊은 뜻을 통하여 알며 뜻을 세움이 篤實(독실)하여 놀고 장난함을 즐기지 않았다.

 

아이 때에 이미 선비의 기질로 雅淡(아담)하게 되었고 장대하여서는 文章에 힘을 쏟아 諸子白家語(제자백가어)를 뚫어내고 더욱이 性理學 서적에 뜻을 더하여 마음이 잠겨 이치를 탐색하여 精微한 經義를 뚫고 깨달음에 스스로 攄得(터득)한 바 많았다.

 

萬曆(만력) 임진(선조 二十五, 1592年)에 왜구가 침입하자 공이 從第 濤(도)와 충청도 회덕으로 피란할 때에 매양 先祖의 諱日이나 時俗名節을 만나면 제사를 폐하지 않고 능히 정성과 禮를 다함이 집에 계실 때와 한결같이 하니 당시 회덕 사람이 아끼고 공경하여 衣食을 資給(자급)하였다

 

丁酉再亂(정유재란)에 동쪽 경주 자옥산중에 더부살이 할 때에 경주 이하 여러 고을이 다 함락되고 賊路에 고향 단계의 길이 막힘에 추석명절 省墓하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선대 묘소에 성묘하고 돌아갔으니 선조에 대한 追遠報本(추원보본)의 정과 선대를 받드는 정성이 게으르지 않으니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 마다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己亥에 왜란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종사하며 곁으로 과거공부를 통하여 辛丑年에 進士가 되었다.

성균관에 유학하여 크게 선비들 推重을 받았다.

어느날 밤 선조임금이 거리를 巡遊(순유, 暗行)하시다가 글 읽는 소리를 들으시고 風雅한 음성이 맑고 밝아 특별히 叙用하고 가상히 여겨 “唐詩正聲” 4권을 下賜하시니 온 성균관이 그 일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壬子年 增廣試(증광시)로 관직에 나아가 비로소 承文院에 뽑혔는데 小人

이 그를 해치기에 옮겨 성균관에 보직되니 공이 벼슬길이 통하거나 막히거나 를 마음에 두지 않고 당시의 일이 날마다 잘못 되어 감을 보고 물러나 산야에 엎드려 몸을 정결히 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乙卯 이후에 例로 성균관 직품에 올랐으나 이에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에 가야산 역적(鄭仁弘)이 국사를 專擔(전담)하여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사대부들이 찾아가지 않는 자가 드물었으나, 公의 從兄弟가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姻親으로 공의 才德을 익히 알고 欽仰(흠앙)하여 끌어들여 堂與를 삼고자 하여 이욕으로 유인하는 일이 잦았으나 公은 문득 침뱉아 꾸짖기를 “늙은 도적이 어찌 빨리 죽지 않고 감히 이런 말을 하는고?”하며 대숲에 초가를 지어 스스로 “黙翁”(묵옹)이라 號하니 대개 “말이 없으면 능히 포용할 수 있다” (黙足有容)는 뜻이었다.

 

드디어 세상의 번거로움에 떨어져 문장이나 글씨 (翰墨)를 즐기며 십년 동안 굳게 누워 몸을 마치려는 듯이 하니 사람들이 다 그를 濁流속의 砥柱

(지주:황하의 탁류 속에 있는 섬으로 여기서는 맑은 물이 나와 공작새가 이 물을 먹는다 함)처럼 여기고 丹城 一境의 선비와 백성이 윤리기강에 죄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 공의 아름다운 덕의 향기 때문이었다.

天啓 癸亥年(1623년) 仁祖가 반정하고 다음해 갑자년에 兵曹佐郞을 받고 얼마 후에 平安都事가 되었다가 병인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刑曹正郞으로 옮겼다.

 

辛未에 寧海府使에 보직되니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라 하는데 공이 부임하는 날 보니 장부가 구름같이 밀리고 소송의 文牒(문첩)이 산처럼 쌓였기에 귀와 눈이 스치는 대로 판결을 물 흐르 듯이 하였고 아랫사람 거느리기를 채찍이나 매로 하지 않으며 부역을 조금도 시키지 않았다. 한결 같이 늙은이 봉양, 빈궁한 사람 구제, 학교 일으키기, 농사 권하기를 第一의 정책으로 삼으니 일 년 이내에 정사가 通暢(통창)하고 民人이 화목하여 嶺東의 最善府使가 되었다.

 

癸酉年 봄에 병환이 드시어 五月 十九日 영해부 官衙(관아)에서 別世 享年 六十五세 이해 12월에 山陰縣 明珠洞 丙坐언덕에 장례하니 이것이

公의 一生의 始終이었다. 配位(배위)는 南原梁氏로 祖 喜는 吏曹參判

이요 考의 諱는 弘澍(홍주)로 義禁部都事였다.

一男三女로 男 克鼎(극정)은 承議郞이요 竹山朴氏 節度使 贈兵判 燁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은 정성과 효도가 出天하여 부모 섬기기에 힘을 다하여 비록 하찮은 음식을 올려도 그 뜻을 기쁘게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父母喪을 당하여서도 喪服과 葬禮 祭禮를 한결같이 朱子家禮에 의하고 加減하여 슬퍼하는 모습에 게으르지 않았으니 비록 옛날에 居喪 잘 하는 자라도 넘어설 수 없었다. 형제에 처신은 우애로 하며 宗族 戚党(척당,인척) 대접은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여 한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어 고장에서 그를 일컬고 사모했다.

 

天資(타고난 모습)가 장엄하고 剛毅(강의)하며 단아 중후하여 의관을 바루고 묵묵히 앉아 깍은 듯 가히 범접하지 못할 기색이 있으나 손님을 대하고 尊卑間 상대할 때는 마음을 열고 정성을 보여 잘난체하는 행위가 보이지 않으며 학문을 함에 經典에 뿌리를 두어 젊어서부터 늙음에 이르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으셨다.

 

때때로 스승과 벗들과 함께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문답할 때에 화창히 통달하여 문답이 쾌활하고 의리의 분별과 시비를 나눔에 毫末(호말)을 분별하고 실끝처럼 분석하여 마음을 털어놓아 숨김이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경청케 하여 어두운 자가 밝아지고 의혹을 품은 자가 알게 되니 그 斯文(儒學)에 힘씀이 역시 크다 하겠다.

 

하늘이 公을 吾東(우리 조선)에 태어나게 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었다 덕으로 一世의 모범이 되고 재주로 나라를 경영할 만하여 出身退處 行動擧止(행동거지)가 正大光明했으니 만약 조정에서 當路(執權)하게 되어 그 蘊蓄 (온축)한 才德을 펴게 했더라면 돕고 다스려 받들고 변화

하며 薰陶(훈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功效가 대개 우리 임금과 백성을 堯舜의 君民으로 만들지 못했으랴!

 

임종의 날에 寧海의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듯하고 원근의 親疎들이 통곡하여 실성하고 장례에 이르러 사대부나 큰 선비들이 닭고기와 술로 祭奠을 드리는데 여러 고을 백성들이 다 모여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며 “철인이 가셨구나! 이런 분이 옛날에 훌륭한 인물(山陰守令)을 본떠서 그것을 능히 지킨자 아닌가!”하였다.

 

공께서 交遊하던 사람은 모두 一代의 名臣碩學들이니 道義로서의 스승은 寒岡 鄭逑先生(한강 정구선생) 旅軒(여헌) 張顯光(장현광) 兩先生이요 공부하시던 情誼(정의)는 吳思湖(오사호), 朴龍湖(박용호)요 死生의 契은 鶴沙(학사) 金先生의 父子兄弟요 文翰(문한)으로 사귄 분은 李澤堂

(이택당), 趙竹陰(조죽음) 이였다. 가장 心許한 분은 月沙 李廷龜(이정구) 先生으로 詩와 文章 편지가 매우 많았으며 긴 律詩 일편과 遺墨이 아직 있어 손을 씻고 받들어 읽으니 저절로 不覺中에 공허한 세상에 정신을 交流할 수 있었다.

 

公의 題詠 詩文이 아직 板刻되지 못하고 화재로 사라져 有德한 말씀이 오래 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까운 일이나 諸賢의 제문과 挽詞 (만사) 를 考證(고증)하면 그 썩지 않을 문장이 남았는데 또 무엇을 한탄하랴!

 

아아 公의 성한 德望과 특별한 行實은 실제로 後生末學(自稱謙詞)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엿보고 표현할 일이 아니나 적이 두려운 것은 세대가 점점 멀어져 발자취가 점점 사라질까 함이라 僭濫(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엉터리로(杜撰) 귀와 눈이 닿는 대로 서술했으니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말하는 것 같지 않겠는가?

뒤에 붓을 잡을만한 有德君子가 있어 아마 이 글을 확장하여 크게 한다면 역시 다행이라 할뿐이다.

後學 永陽 李秀封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