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시조 幸(행)
휘를 고려사에는 행(行)으로 썼다.
본래 신라 왕족 김씨(金氏)로 고창(古昌-현 안동)을 지키고 있었는데 경애왕 4년(927) 11월에 후백제 견훤이 경주를 기습하여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보여 임지에서 적개심을 삭이고 있던 중 경순왕 3년(929) 12월에 견훤(甄萱)이 고창을 포위함에 고려 태조가 구원하려 왔다.
공이 성주 김선평(金宣平)과 막료(幕僚) 장정필(張貞弼)에게 견훤은 시왕욕비(弑王辱妃)한 불공대천(不共戴天)의원수이니 왕태조(王太祖)에게 귀의(歸依)하여 견훤을 무찔러 임금의 원수를 갚고 백성을 구제하자고 설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연합군이 병산(甁山)에서 백제를 크게 무찔러 수세에 급급하던 고려가 삼한통일의 전기(轉機)를 잡았다.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김선평은 대광(大匡-2품), 김행과 장정필은 대상(大相=4품)을 배하고 특히 김행은 병기달권[炳機達權=기미(機微)에 밝아 권도(權道)를 달성함]하였다 하여 권(權)으로 사성(賜姓)하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올려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통일 후(태조 23년=940)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오르고 성종 3년(983)에 부민이 어육(魚肉)을 면하게 한 공덕을 기려 부사(府司)에 사당을 세워 삼태사에게 제향을 드리니 태사묘(太師廟)의 시작이며 후대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셨다. 또 1785년(正祖 9)에 경주 강동면(江東面)에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세웠다.
(墓)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天燈山) 남쪽 조화곡(造化谷)에 자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