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 강 공

충 강 공

 

m01.png 東溪先生略傳 (樊巖 蔡濟恭 撰 神道碑文刪削)

 

공의 휘는 도(濤)요 자는 정보(靜甫)이며 호는 동계(東溪)이니 안동권씨로 복야공파 23世이시다.

 

1575년(宣祖 8) 단성현 단계촌에서 나셨다. 관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그 이름을 듣고 고을에 순도(巡到)하여 한서(漢書)를 가지고 같이 담론하고는 탄복하여 “네가 나의 스승이로다.” 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 10歲였다.

 

임진년(1592) 봄에는 아버지께 아뢰기기를 일가권속을 거느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모두가 다 웃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왜구가 크게 쳐들어오자 비웃던 자들이 비로소 놀라 탄복하였다. 명년에 부친 승지공(諱:世春)이 창의(倡義)하여 곽망우당(郭忘憂堂=홍의장군 곽재우)의 진영에 종군하셨다가 전염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별세하였는데 빈소를 차리자 친지가 권하여 말하기를 어찌 예법을 조금 어겨 전염을 피하지 아니하는가? 하였으나 집례를 더욱 엄하게 하였다.

 

36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3년 뒤인 癸丑년(1613)에 大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때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권력을 잡은 신하가 좋은 벼슬에 추천해 주겠다는 이가 있자 공은 선채로 이를 사양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정인홍(鄭仁弘)을 가르켜 가야(伽耶)의 늙은 도적이라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런 위태로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1623년에 인조(仁祖)가 반정을 하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는 낙안(樂安)군수 임경업(林慶業)이 봉물로써 뇌물을 바친 일을 논핵(論劾)하였는데 그 계사(啓辭)에 재상 김류(金瑬)가 연관되어 대죄할 것을 고하였다. 임금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로서 그와 같이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여 공을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좌천시켰다. 흥양으로 나가서 넉달이 지난 뒤에 다시 사간(司諫)으로서 다시 소환되니 온 관내 백성들이 수레를 더위잡고 울면서 작별을 슬퍼하고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인조 신미년에는 임금께서 아버지의 묘호(廟號)를 추숭(追崇)하는데 성종(成宗)의 고사에의거하여 시호를 의논할 것을 명하니 공은 집의로서 아뢰기를 일이 중용을 얻지 못했다. 하자 임금이 유시하기를 남의 자식된 자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로다. 하였으나 공은 다시 계언(啟言)을 올려 말하였다.

 

“시호(諡號)라는 것은 자식이라고 하여 그 아비에게 사사로울 수가 없고 신하라고 해서 자기의 임금에게 사사로울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유려(幽厲)에게 시호를 올린다는 것은 어버이를 기롱하는 불효자가 되고 추숭하는 임금은 선왕(宣王)과 평왕(平王)에 미치지 못하니 불행히도 임어(臨御)하지를 못하였고 정사를 발하는 데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즉 덕망과 업적이 무성하다 할지라도 가히 찾을 자취가 없고 말로써 밝힐 수가 없는데 강의로 허무한 사실을 새긴다면 성실을 추구하는 도리에 흠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에 임금이 크게 노하여 화가 어떻게 미칠지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대신과 대간이 교장(交章)으로 상소를 하여 공을 구해(救解)하는 바람에 단지 해남현(海南縣)으로 유배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이로써 공은 소리가 조야에 떨치게 되니 조정의 이름난 공경들이 유배되는 공을 배웅하여 강상에 까지 나와 전별하고는 자차(咨嗟)하고 탄식하면서 돌아갔다.

 

병자년 겨울에는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야로 달려가서는 조령의 길이 막히니 더 나아가지 못하고 관찰사 심연(沈演)의 막하에 들어가 참찬(參贊) 규획(規劃)하였는데 쌍령(雙嶺)에서 아군이 패함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뿌리며 효유(曉諭)하여 패잔병을 수습해가지고 다시 구원하려 나갈 계책을 세우다가 오랑캐의 군사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1640년(인조18) 대사간(大司諫)을 배수하여서는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대간이 규칙을 잃은 것을 탄핵하여 거론한 것을 논하여 가로되 “해조의 권병(權柄)을 쥔 것이 더없이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하였다. 훈신(勳臣)을 회맹(會盟)시켜 관직과 자급을 남발하는 것을 논계하여서는 이를 개정하여 배수하고 별도로 은사를 베풀 것을 청하니 사론(士論)이 이를 많이 지지하였다.

 

공은 나이가 많이 들어 치사하고 쉴 때가 되었으므로 고향의 전리로 돌아갔다. 甲申년(1644) 8월27일에 동계정사에서 졸하니 향년이 70歲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증직을 받으시고 단성고을 수청동의 申坐 언덕에 장사하고 그 후 사림(士林)이 공을 연모하여 顯宗13년 (1672)에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공을 합향(合享)하니 이곳은 곧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을 시축(尸祝)하는 곳이다.

 

1789(正祖11) 지방 유림이 조정(朝廷)의 윤허(允許)를 받아 동계정사(東溪精舍)터에 완계서원(浣溪書院)을 창건하고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이안(移安)하고 장질(長姪) 동산선생(東山先生)을 종향(從享)하였다.

 

1824(순조25) 충강공(忠康公)이라 시호를 받으셨다. 자신을 위태로이 하면서 임금을 받들은 것이 “忠”이요 (이치의) 원천에 도달함이 “康”이다. (危身奉上曰忠。淵源流通曰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