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13세 한공(漢功)
호는 일재(一齋)이고, 시호는 문탄(文坦)이다. 호칭은 시호를 따라 문탄공(文坦公)이라 한다. 고려 충렬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충선왕이 태자 신분으로 원나라에 체류하고 있을 때 종신(從臣)으로 충선왕의 자택에서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인사 행정을 주관하였으며, 극진히 모셔 신임을 받았다. 후일 태자가 귀국하여 충선왕으로 등극하자 중용되어 1309년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1311년에 첨의평리(僉議平理)로 부친 책(頙)이 맡았던 직에 올랐고 곧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어 영광을 더했다.
1313년에 김심(金深), 이사온(李思溫) 등의 무함으로 투옥되었으나 충선왕의 구명으로 곧 석방되고 앞의 두 사람은 도리어 유배되었다. 1314년 충숙왕은 선왕인 충선왕을 한결같이 보필해온 공로를 인정하여 포상하였고, 원나라에서 세 왕을 추증할 때 그 문서를 작성한 공로로 녹권을 내리고 찬성사(贊成事)로 전임시켰다.
1319년 상왕 충선왕이 강소(江蘇), 절강성(浙江省)을 유람할 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배종(陪從)하였다.
관작이 추성동덕협찬공신(推誠同德協贊功臣)에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에 이르렀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封)해졌다. 만권당과 성균관에서 고경(考經)하였고, 문장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이름을 떨쳤으니 공의 학문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현, 이색, 권근, 김종직 등 학자들이 선생을 기리고 있음도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서로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
14세 중달(仲達)
문탄공의 아들. 호는 유암(柳菴), 시호는 충헌(忠憲)이며 화원군(花原君)으로 봉해졌다. 숙위사(宿衛士)로 원 나라에 들어갔고, 거기서 명위장군(明威將軍), 제군만호부(諸軍萬戶府)의 만호(萬戶)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政策安社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의 직위에 올랐다. 배위는 대부인(大夫人) 칠원윤씨(漆原尹氏)로 전서(典書) 길손(吉孫)의 딸이다.
묘소는 대략 400여 년간 실전되었다가 영조 32년 1756년에 찾았다. 그 내력은 대략 이러하다. 공의 넷째 사위는 학자로 이름난 목은(牧隱) 이색(李穡)인데, 목은의 외손으로 송계일(宋啓日)이란 이가 전북 김제시 금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역양상리(櫟陽上里) 민가 울타리 가에서 마멸된 빗돌을 발견하고 살펴보니 ’화원군권공중달지묘(花原君權公仲達之墓)’ 라 새겨져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예부터 이곳을 권정승 묘동(權政丞 墓洞)이라고 하였다는 사연도 밝혔다.그 후 정조 5년 1781년에 지석(誌石)을 찾아 확증을 갖고 묘산(墓山)을 확보하고 묘소를 돌보게 되었다.
그리고 묘소를 개봉축(改封築, 묘소의 봉분을 다시 고쳐 쌓음)하고 묘비를 세운 것은 우리 참봉공(參奉公)의 자손 관어재인데 시기는 정조 5년 1791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 경남 서부의 우천문(愚川門)자손들이 500리 길을 왕래하며 공의 묘소를 손질하고 묘비를 세웠으며 이후 향사를 잇게 하였으니 대단한 정성이라 하겠다.
1930년 석초(石草) 권두희[權斗熙, 33세, 단성 강누] 公이 답 1천평을 헌성하여 이를 기재(基材)로 화원군 묘소 수호와 재산관리를 위한 종회 경비 및 세사 참제자 여비 등에 쓰고 있다. 묘소 아래에 있는 묘각(墓閣)인 모원재(慕遠齋)는 1908년에 처음 창건되고, 1940년에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1943년에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후손들의 성금에 의해 이뤄진 것인데 그 경비의 6할 이상을 정재(靜齋) 운현[雲鉉, 35세, 단성 교동]公이 부담하였다.
1964년 다시 중수하고 묘비도 다시 세웠다. 묘도비명은 심재(心齋) 창현[昌鉉, 35세, 단성 교동]公이 지었다.
34세 재규(載奎)
자(字)는 군오(君五), 호는 송산(松山), 만년에는 이당(而堂)이라 하였다. 상암공(霜嵒公)의 11세손으로 단성(丹城) 교동(校洞)에서 거주하였다. 서구열강과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노골화되던 1870년에 태어나 1952년 6.25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때에 세상을 떠났다. 83세를 사는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송산은 어려서는 계남(溪南) 최숙민(崔淑民)에게 수학하였고, 20세가 되어서는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를 찾아가 배알하였다. 그는 스승 노백헌을 좇아 일제에 항거하는 논의와 행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1911년 노백헌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6년 46세 되던 해부터는 교육에 힘을 기울이게 되는데, 교동마을 뒤 샘 위에 소천정(昭泉亭)을 짓고, 그곳에서 기거하면서 문생들을 가르쳤다.
1935년 65세 되던 해에는 소천정이 협소하여 인곡서당(仁谷書堂)을 건립하여 문생들을 가르쳤다. 이처럼 송산은 조선 후기 나라의 안위가 풍전의 등화와 같고, 유학이 존폐의 기로에 있을 때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유학에 있다고 보고 평생 유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정주학(程朱學)에 뜻을 두어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에 전심하고 생활예절인 사예의문(四禮疑問)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다. 천상문답(泉上問答), 위삭록(慰索錄), 심신경중론(心身輕重論) 등으로 학문 정신과 근신하는 태도를 나타냈고 천정절목(泉亭節目)은 후학에게 지켜야 할 학칙을 기록하여 많은 문하생(門下生)을 배출하였다.
인곡서당(仁谷書堂, 단성 구인동, 경남도 문화재)에 제향(祭享)되고 문집 38권 25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