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산 공

동 산 공

 

ik024.png 동산 권극량 선생東山 權克亮 先生 (西紀 1584~1631)

 

公의 본관은 안동, 諱는 克亮이시고, 字는 士任, 號는 東山이다. 1584년 朝鮮中期 宣祖朝(선조 17)에 慶南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태어났다. 고려조에 右政丞을 지낸 權漢功을 비롯하여 仲達(花原君), 嗣宗(判宗正寺事) 등 顯達한 先祖들이 많았다. 尙衣院別坐 權運이 증조부이고, 임진란에 倡義한 左承旨 權世春은 조부이며, 權瀹(1560~1590) 處士가 부친이시고, 모친 咸安 趙氏는 忠毅公 大笑軒 趙宗道의 딸이다.

 

1590년 부친 處士公이 大科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吏曹(天官) 官衙로 부임을 앞두고 있었으나 갑자기 병을 얻어 早世하시니 公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처사공의 상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부 栗軒公(世春)을 비롯한 문중의 어른들이 倡義하여 의병으로 전장에 나아가니, 남아있는 婦女乳兒 가족들은 피난처를 전전(轉轉)하며 안위를 도모하였다. 성주 땅에 寓居할 적에는 叔父 東溪公과 함께 旅軒 張顯光(1554~1637, 仁同人) 선생의 문하에서 師事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秋潭 尹銑公의 딸 坡平 尹氏와 혼인하였다. 公은 일찍이 향시에서 장원을 하기도 하여 주위로부터 촉망받는 재사(才士)였다. 선조 조정(1567~1608)에 이어 광해 조정(1608~1623)이 물러나고 인조 조정이 들어서는 격변기에 조정에서 관직(英陵參奉)을 내리고 出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嚴光의 故事〉를 본받아 관직이나 부귀 영달에 뜻이 없음을 전하였다. 단계 盛才庵에서, 하동 東山精舍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시문을 즐기시다 48세로 早世하였다. 어가문답(漁歌問答), 강호잡영(江湖雜詠) 등 백여 편의 시문이 『東山先生文集』에 전한다.

 

자녀는 2남1녀를 두었으며, 墓原은 산청군 산청읍 내수리 산 105-1 정수산 아래이다. 정조 조에 國朝人物考에 입록되었고, 1788년에 숙부 東溪公을 모신 浣溪書院에 봉안하고 230여년간 享禮를 봉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