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암 선 생
상암선생 약전(霜嵒先生 略傳)
學問(학문), 德行(덕행), 詩文(시문), 科官(과관), 忠節(충절) 가운데서 한 가지만 갖추어도 훌륭한 인물로 추앙받을 수 있는데, 이 모두를 갖춘 인물이 있으니 곧 霜嵒權先生(상암권선생)이다.
선생의 諱는 濬(준), 字(자)는 道甫(도보)요, 霜嵒(상암)은 그 號(호)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太師(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 權幸(권행)이 그 시조다.
이후 대대로 名公巨卿(명공거경)과 鴻儒碩學(홍유석학)이 배출되어 國中 名閥(국중명벌)로 손꼽힌다. 都僉議右議政 醴泉府院君(도첨의우의정 예천부원군) 文坦公(문탄공) 一齊(일재) 휘 漢功(한공), 大匡(대광) 花原君(화원군) 諱 仲達(중달)이 고려후기에 역사에 혁혁하다.
그 五代孫 生員 典獄署奉事(전옥서봉사) 諱 金錫(금석)이 단성에 奠居 (전거)하였으니 선생의 高祖다. 永慶殿(영경전) 參奉(참봉) 原從功臣 (원종공신) 諱 時準(시준), 尙衣院 別提(상의원 별제) 휘 運(운), 軍器寺 判官(군기시 판관) 諱 世人(세인)은 父公(부공) 이상 三代다. 妣位(비위)는 全義李氏로 忠順衛 公憲의 따님이다.
先生은 1578(宣祖11)년 二月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容貌(용모)가 端重 (단중)하고 擧止(거지)가 非凡(비범)하였다. 스스로 글 공부를 좋아하여 父老(부노)의 督勵(독려)가 필요 없었다.
六.七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居喪(거상)하는 것이 成人과 같았다. 백형 黙翁(묵옹) 諱 潗(집)을 따라 廬墓(여묘)하니 鄕人(향인)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십오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난리 속에서도 늘 手不釋卷(수불석권)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자라서 寒岡(한강) 鄭逑先生 (정구선생) 의 薰陶(훈도)를 입어 퇴계와 남명 兩先生의 學脈 (학맥)에 連接(연접) 되었다.
1608년 부친상을 당하여 廬墓(여묘)하며 喪期를 마쳤다. 1613년 생원에 이어 文科(문과)에 급제하였다. 黙翁(묵옹), 종형 東溪(동계) 諱 濤(도) 세명이 文科에 及第(급제)하여 家聲(가성)을 크게 선양하였다. 성균관 박사로 仕官(사관)을 시작하여 1618년에는 성균관 典籍(전적)으로 승진 했지만 광해조의 亂政(난정)으로 취임하지 않고 초야에서 黙翁, 東溪와 함께 학문에 沈潛(침잠)하였다.
棟溪(동계) 鄭蘊(정온)이 영창대군을 죽인 江華府使(강화부사)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鞠問(국문)을 당했을 때 棟溪를 伸救(신구)하려고 入闕上疏 (입권상소)를 했는데 이 때 선생은 서울에서 極力(극력) 주선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刑曹佐郞(형조좌랑)을 거쳐 結城縣監(결성현감) 으로 나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頌德碑(송덕비)를 세웠다.
1627년 정묘호란 때 宣傳官(선전관)으로 강화도로 왕을 扈從(호종)했다가 禮曹佐朗(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 亂(난) 후에 禮曹正郞 (예조정랑)을 거쳐 遂安郡守(수안군수)에 임명되었다. 전란의 복구에 능력 있는 文官이 필요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선생을 보낸 것이다. 이 때 兵曹判書(병조판서) 李廷龜(이정구)가 선생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아쉬워했으나, 선생은 “나라 일을 회피하려 해서 되겠소?”하고 바로 부임 하였다. 治績(치적)이 크게 있어 왕이 옷감 한 벌을 하사하였다.
1631년 봄 돌아올 때 행장이 아주 단출하였다. 떠나온 뒤 군민들이 遺愛碑(유애비)를 세웠다. 이 해 춘추관기주관, 성균관 司藝(사예)를 역임하고 通禮院(통례원) 相禮(상례)로 옮겼다.
1632년 봄 三陟府使(삼척부사)로 나갔다.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고 잡다한 세금은 다 없애고, 폐단을 개혁하고 학교를 일으켜 교육을 베푸니 백성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1634년 임기가 끝나자 백성들이 유임하게 해 달라고 監營에 요청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전송하였고 나중에 銅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1635년 直講(직강) 掌樂院正(장악원정)을 거쳐 이듬해 光州牧使 (광주 목사)로 나갔다. 세금과 부역을 줄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밀린 還穀(환곡) 萬石(만석)을 탕감해 주었다. 이 해 겨울에 청나라 軍隊가 쳐들어왔는데 선생은 군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 仁祖(인조)를 구원 하려고 했다. 和議(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왔다.
光州牧使 職(광주목사 직)을 다하고 떠날 때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듯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다. 후에 비석을 세워 欽慕(흠모)하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그 후에 坡州牧使(파주목사), 尙衣院正(상의원정)에 임명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42(仁祖22)년 10월 16일에 丹城의 집에서 서거하였다. 윤11월24일에 宜寧縣(의령현) 縛嶺山(박령산) 酉坐(유좌)에 안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하러 왔으니 그 仁厚(인후)한 德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配位(배위) 淑人(숙인) 咸安趙氏는 固城縣令 (고성현령) 趙凝道(조응도)의 따님인데, 婦德(부덕)이었다. 묘소는 같은 경내이다.
四男一女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通德朗(통덕랑) 克履(극이), 그 다음은 克觀(극관), 그 다음은 克有(극유)인데 生員에 급제한 뒤 繕工監(선공감)參奉을 지냈고, 德川書院(덕천서원) 院長을 맡아 江右儒林(강우유림)을 이끌었다. 다음은 克謙(극겸)인데 奉直郞(봉직랑)을 지냈다.
克履(극이)의 아들은 欽(흠) 生員, 鑐(유), 鐵(철)이다. 克有(극유)의 아들은 進仕 釴(익), 鎰(일), 錡(기)이다. 克謙(극겸)의 아들은 生員 斗瑞(두서)이다. 이하 자손이 蕃衍(번연)하였는데 저명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아아! 先生은 天資(천자)가 俊逸(준일)하고 風儀(풍의)가 純粹(순수)하였다. 성품은 원만하면서도 강직하였다. 和順(화순)한 기운이 안으로 쌓여 밖으로 英華(영화)가 나타나 寬厚(관후)한 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고, 榮達(영달)을 위해서 급급하지 않았고 오직 의리를 지켰으므로, 훌륭한 자질에 알맞은 官職(관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쌓은 經綸(경륜)을 크게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歎惜(탄석)을 금치 못하게 한다.
桐溪(동계), 月沙(월사), 寒沙(한사) 姜大遂(강대수) 등과 道義之交(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생이 逝世(서세)한지 어언 380년이 지났다. 산소에는 知己인 龍洲(용주) 趙絅先生(조경선생)이 지은 墓碣銘(묘갈명)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 있어 많은 사람이 볼 수가 없고 또 한문으로 되어있다. 쉽게 알 수 있는 事蹟碑(사적비)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세우고자 후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후손 載炯(재형), 悳相(덕상)이 와서 請文(청문)했는데, 그 崇祖의 精誠(정성)에 깊이 감동하여 크게 사양하지 않고 그 事蹟(사적)을 서술하고 끝에 銘(명)을 붙인다.
學德은 깊고 높고 經綸은 넉넉했네.
寬厚(관후)한 君子風貌(군자풍모) 大科로 出仕했네.
權奸(권관)들 專擅(전천, 전행)속에 큰 뜻을 어이 펴라?
反正後[반정(仁祖)후] 黨人(당인)들도 棟樑(동량, 인재)을 멀리 했네.
바른길 추구하다 顯要職(현요직) 못 얻었네.
백성들 福없으니 탄식해 무엇하리?
훌륭한 인물이라 師友들 稱頌籍籍(칭송적적)
龍洲(용주)의 墓碣銘(묘갈명)은 不朽(불후)의 公評(공평)이라.
흠 없는 한평생은 영원한 스승이라 事蹟(사적)을 새겼나니
後人들 欽仰(흠앙)하리.
辛卯(2011)年 嘉俳節(가배절)에 文學博士 慶尙大學校 敎授 許捲洙 謹撰
題字 十二世孫 泰鉉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