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에 수탈·착취당한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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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작성일24-06-28 10:54 조회62회 댓글0건본문
‘24.06.28 조선일보 황대진 사회부장
화성 배터리 공장 화재로 숨진 23명 중 17명이 중국인이다. 대부분 20~40대 젊은 조선족이다. 현장을 찾은 싱하이밍 중국 대사는 “중국 당과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뼈아픈 교훈을 얻어 다시는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화재 원인 규명과 피해 수습, 재발 방지는 싱 대사 말이 아니라도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의 ‘충고’를 들으며 떠오른 것은 민족의 기구한 운명이다. 조선족은 중국인이기에 앞서 한민족이다.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가 먹고살기 위해 돌아왔다. 우리 민족이 우리 땅에서 숨졌는데 중국이 큰소리를 친다.
19세기 조선은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 때인 1809~1810년과 1832~1833년, 고종 때인 1876년 기근이 기록에 남아 있다. 1832~1833년 기근은 순조가 백성의 20~30%가 줄었다고 할 만큼 심각했다. 굶어 죽은 사람도 많지만, 나라를 떠난 사람도 많았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땅은 비옥한데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소문난 간도로 갔다. 간도의 한인은 1860년대에 7만7000명에 달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의 수탈과 압제를 피해 온 사람이 합류했다. 1940년 간도 한인은 145만명으로 늘었고, 지금 중국 내 조선족은 190만명이다. 이 중 70만명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
연해주 이주도 비슷한 시기 시작됐다. 1937년에 18만명의 한인이 극동 러시아 지역에 살았다. 그해 스탈린은 이들 거의 모두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과 전쟁을 앞두고 한인이 일본 첩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 중앙아시아 낙후 지역을 한인 노동력을 이용해 개간한다는 경제적 목적이 함께 작용했다. 지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50만명이고, 이 중 8만명이 국내에 들어와 산다.
150여 년 전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조선족과 고려인이 생겼다. 화성 화재로 조선족이 겪는 고통의 씨앗은 그때 뿌려졌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힘’ 아니면 ‘돈’이다. 급할 때는 돈보다 힘이다. 구한말 역사는 주변국의 한민족 수탈사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전쟁과 노역에 한인을 이용했다.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강제 동원된 한인이 780만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간도의 한인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전에 6만3000명이 참여해 3500명이 숨졌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한인 2만여 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다.
민족 수탈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19세기만큼 먹고살기 어려운 북한 주민이 대상이다. 중국의 수산물 가공회사에서 일하는 북 주민 1000여 명은 하루 18시간 냉동 생선을 손질한다. 공장 관리자는 수시로 때리고 “도망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고 협박한다. 이 생선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된다. 한인의 노동을 착취해 만든 상품을 한인에게 팔아 중국인이 주머니를 채운다. 러시아 건설 현장은 북한 인력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2017년 유엔 제재 직전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는 3만명, 전체 외국인 노동자의 20%였다. 이들은 1년에 3일 쉬고 하루 16시간 노동해 한 달 100달러를 손에 쥐었다.
조선족의 죽음을 보며 50년, 100년 후 우리 후손이 어디서, 어떤 대접을 받으며 살지 상상해본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이 선진국일까. 과연 나라가 존재하기는 할까. 자식이 자기보다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나라가 빈약해 주변국에 유린당한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싱 대사 발언에서 얻어야 할 ‘뼈 아픈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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