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己未 만세운동과 丹岡公 權肅麟

페이지 정보

권태현 작성일24-04-22 20:03 조회109회 댓글0건

본문

단계·단성 기미(己未-1919) 만세운동과 丹岡 권숙린(權肅麟)

1887629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신등면(新等面) 단계리(丹溪里)에서 <충강공 12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산청군 신등면과 단성면(丹城面)의 만세운동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러 상경했던 김상준(金相峻)·(尹圭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만세 소식을 고향에 알리면서 비롯되었다. 김상준의 아버지이며 인근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림인 김영숙(金永淑)이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권숙린(權肅麟)이 김영숙과 뜻을 같이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산청군 신등면에서는 1919319일 신등면 단계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으나 당일 아침 일본 헌병에 대거 검거됨으로써 거사 계획은 실패하였다.

319일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김상호(金相浩김영숙(金永淑정태륜(鄭泰侖김선림(金善林김상문(金相文) 8명과 함께 긴급 모임을 갖고 320일 단계리 시장과 321일 단성면 성내리 시장에서 의거를 다시 결행하기로 하였다.

320일의 시위는 신등면 단계리 시장에 모여 단성면 성내리 시장으로 이동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오후 2시 단계리 시장에 600~700명의 군중이 모이자, 주동 인물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성내리 장터로 향하였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인파가 시위를 위해 성내리 장터에 도착하자 일본 헌병대에서는 이전에 구금한 김상준 등 5명을 석방하는 대신 김영숙과 정태륜에게 군중을 해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리를 누비면서 밤이 깊도록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무력 진압에 나서 주동자 29명을 검거하였다.

이날의 시위 도중에 동생 권숙봉(權肅鳳)이 주동자로 검거되자, 군중과 함께 단성주재소를 습격하여 동생을 구출하고자 하였다. 이어 이튿날인 21일에는 김응률(金應律) 등에게 명해 주민 50여 명을 집합시키고 지금부터 단성면 성내리로 가서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이니 바로 동행해야 한다. 만일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벌금을 거두거나 또는 마을을 떠나야 한다라고 말하고 주민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오후 1시 단성 장날을 맞아 모인 군중과 성내리 장터의 시위 인파가 합세하여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투옥된 사람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진주와 거창에서 지원 나온 일본군 80~90명이 도착하자, 헌병대는 무자비하게 총격하여 시위 군중 가운데 1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같은 해 81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917일 대구복심법원과 101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39. 8. 2 別世>

대한민국 정부는 1994建國勳章 愛族章追敍하였다.

<A 1950. 4他界夫人 全州李氏()獄苦 同苦의 의미로 겨울에 버선을 신지 않았다 함. B 創氏改名 宗孫 大小家永嘉權으로 創氏 例 :柄甲永嘉權柄甲, 台赫永嘉權台赫으로>

<受刑記錄 鄭泰侖:都山面長竹里 32歲 懲役2年, 金永淑:新等面坪地里 45歲 懲役5月, 金相浩:坪地里 43歲 懲役7月, 金善明:丹城面沙里 48歲 懲役2年> 

출처 : 독립운동인명사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