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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原君 墓를 찾아 주신 宋啓日公의 正義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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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작성일23-12-01 12:43 조회2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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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閭先生(花原君 18世孫 諱 相迪)이 지은 慕遠齋 講誼錄序에서) 

전라도 금구(金溝)고을 낙양(洛陽) 상리(上里)에 우리 선조 충헌공(忠憲公)의 묘가 있어 아래에 모원재(慕遠齋)가 있고 재실에 권씨 송씨 강의록이 있으니 대개 우리 선산의 같은 고을 돌아가신 선비 여산(礪山) 송공(宋公) () 계일(啓日)이 호남의 이름난 집안인데 우리 충헌공의 사위 목은(牧隱) () 문정공(文靖公-)의 외손으로써 우리 종중에 어찌 우아한 친호(親好)가 없으리오? ! 임진왜란 이후로 상리 선산이 묵고 징험(徵驗)이 없어 오래 우리 번연(蕃衍)한 여러 종중이 서로 이어 한을 끼친 것이 백년이 되었다. 송공이 이웃 마을을 지나다가 배광신(裵光臣) 그가 집을 고치면서 뒤안을 파다가 옛 무덤 아래에서 한 비를 얻었는데 비면(碑面)에 충헌공 화원군(花原君)의 묘라는 제목이 있는바 광신이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갑작이 딴데로 옮겨 감추어 묻는지라 송공이 말하기를 이 묘가 발견된 것은 하늘 뜻인데 하늘은 거스릴 수 없다 하니 배가 이르기를 자네는 본손(本孫)도 아닌데 우리와 원망을 맺을 것이냐? 함으로 송공이 할 수 없이 장인 李某한테 돌아와 고하여 이윽고 영남 우리 본손에게 알렸다. 우리 여러 종중이 바로 달려가 관가(官家)에 고발하니 송공이 실인(實印)을 찍어 증거를 첨부하였다. 그러나 가 큰 부자의 세력이 있어 고을이나 감영(監營)으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송공이 도리어 무고로 몰리게 되었으나 공이 끝내 죽기로 굽히지 않으니 법관이 비로소 송공의 속세에 곧은 도리를 품고 이름난 어진 이를 유택(幽宅)에 지키는데 감동하여 드디어 이치에 맞게 엄중히 심문하니 광신 또한 매 맞아 죽고 그 동생 광택(光澤)이 이어 자수하였다. 이에 일이 크게 풀려 이 비를 묘앞에 찾아 세우고 빠진 글자를 완전히 복구함으로 써 고려조(高麗朝)에서 우리 할아버지의 깊은 학문과 위대한 공적을 가상하여 시호를 내려 예로 장사하고 위토와 사패(賜牌)를 소유하고 무덤을 지키는 다섯 집을 두고 사방 국내의 금족(禁足)을 엄중히 한 것을 들어내어 기렸다. 드디어 배가의 집을 헐고 영역(塋域)의 투장(偸葬)을 파내고 묘사에 이바지할 묘원재(慕遠齋)를 지어 고직이를 두고 다시 멀고 가까운 여러 자손이 각각 옛날같이 성묘하고 때맞추어 묘사 올리고 예로써 옛날로 돌아갔다. 소장한 우산도(右山圖)를 여러 재판서류와 같이 여러 종가에 명확히 보관함으로써 후일을 대비한 것이 지금 또 백년이 되었다. ! 송공의 이 비 발견으로써 우리 할아버지의 묘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선영을 위로하고 또 우리 선부형의 유한을 씻어서 마침내 가꾸고 도와 무궁하게 이어가기를 도모함은 진실로 송공의 남보다 뛰어난 강직이 아니면 이 어찌 이런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었으리요? 송공은 참으로 의사요 군자로다. 말하자면 우리 권가의 송씨가 백세 훗날토록 강의를 싫어하지 않아 호남과 영남의 사이가 없는 것은 곧 송공의 세상을 빛낸 어진 자손의 돌아가신 군자의 고절과 지극한 뜻을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것이고 단지 우리 가문의 외외손으로서의 갖는 기대만이 아닌 것이다. 금년 가을에 집안 종제 상후가 오위장 상철, 전 사과 숙희와 함께 가 성묘하고 또 투장한 묘를 파내고 돌아왔는데 묘사를 일년에 한번 지내고 헌관 선정과 여러 절차를 의논하여 정하고 상후는 또 별도로 강의록을 글로 만들어 하나는 재실에 걸고 하나는 송씨 집안에 보내고 하나는 우리 집안에 돌렸다. 나는 쇠약하여 요양 중이라 칭송을 이기지 못하고 문중에서 갔다 온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 후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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